안경 디자이너를 꿈꾼다면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각자의 재능, 살아온 인생과 개성, 철학이 있고 가는 길도 다르니까요. 오늘 적어 내려가는 글은 그저 현업에서 오랫동안 안경을 만들고, 부수고, 팔아보며 정립한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제가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소위 말하는 '삽질'의 시간을 여러분은 조금이라도 줄이셨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화려한 예술가보다는, 현실적인 설계를 하는 사람에 가까운 저의 '디자이너 기준'을 공유합니다. 가볍게 참고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300번째 포스팅' 입니다.
- 디자인보다 시장 분석
기술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 분석'입니다.
내가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나서 내놓는 족족 트렌드가 되는 축복 받은 삶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판매하는 과정의 한 파트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빈 시장이 어디인지, 지금 뜨거운 곳은 어디인지, 앞으로의 흐름은 어떨지 파악하고 방향을 잡는 것이 예쁜 선 하나 긋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방향이 명확하게 정해지면 디자인은 의외로 금방 나옵니다. 방향이 70%, 디자인은 30%입니다. 펜을 들기 전에 시장을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 일러스트보다는 '생산 가능한' CAD 도면
요즘 멋진 3D 툴이 많지만, 안경 생산의 본진인 중국이나 일본 공장의 현장은 여전히 CAD로 소통하고 마무리됩니다. 일러스트(어도비 AI)로 그린 도면은 실제 생산 시 오차가 발생할 확률이 있을 뿐 아니라, 라인을 다듬는 데 캐드보다 불리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공장에서는 다시 도면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의 낭비가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캐드만큼 정확지 않은 부분은 교신을 통해 또 수정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생산이 가능한 도면'을 그릴 줄 아는 것이 진짜 실력입니다. 산업디자인(산디) 출신이 안경 디자인에 유리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치수와 구조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공장과의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 1mm의 미학, 그리고 '공간'에 대하여
제 경험상, 잘 된 디자인은 생산 과정에서 1mm 정도의 오차가 생겨도 전체적인 느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면 설익은 디자인은 1mm만 틀어져도 밸런스가 와르르 무너집니다. 자꾸 수정하고 싶고 뭔가 찜찜하다면, 그 디자인은 엎고 새로 시작하는 게 결과적으로 낫습니다.

그리고 도면에는 반드시 부품이 들어갈 물리적인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나사가 박히든 장식이 들어가든, 고정될 공간과 두께, 강도가 확보되어야 합니다. 모니터 속의 얇고 예쁜 선에 취해 이 공간을 무시하면, 실제로는 조립조차 불가능한 예쁜 쓰레기를 만들게 됩니다.
- 제품화가 먼저입니다 (500개를 폐기하며 배운 교훈)
과거에 디자인 욕심을 부리다 안전 기준을 간과해서 생산한 제품 500개를 전량 폐기한 적이 있습니다. 별로 힘든 디자인도 아니었지만 , 그때의 쓰린 속은 말로 다 못 합니다. 안경은 얼굴에 쓰는 물건입니다. 예쁜 것보다 중요한 건 '생산 가능성과 안전'입니다. 안전하지 않다면 그건 디자인이 아닙니다. 디자인 욕심 때문에 생산은 가능하지만 비용과 시간에 무리가 되는 진행을 하면 해를 넘기고 제품을 받는 '큰 교훈'을 얻게 됩니다.

- 편식하지 마십시오. (울템의 교훈)
재료를 차별하면 기회를 놓칩니다. 과거 '울템' 소재가 처음 나왔을 때, 저는 "싸구려 플라스틱 사출"이라고 무시하며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시장 분석도 안 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은 폭발했고, 그때가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아세테이트, 메탈, 인젝션 등 다양한 재료와 가공 방식을 섭렵해야 디자인이 유연해집니다. 편견은 디자이너의 가장 큰 적입니다.

재료가 달라지면 공정이 달라집니다. 아세테이트 제작 방식은 메탈과도 다르지만, TR이나 울템 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저와 일했던 홍콩의 디자이너들은 인젝션 방식의 스포츠 선글라스까지도 경험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사이의 줄타기
예쁘게만 만들려는 자(디자이너)와 절대 고장 안 나게 하려는 자(엔지니어/공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하는 사람이 진짜 고수입니다. 공장에서 "이건 안 돼"라고 할 때, 왜 안 되는지 기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설득도 수정도 할 수 없습니다. 생산 공장과의 괴리를 모르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게 됩니다.
저에게 의뢰를 했던 수많은 회사의 디자이너들 중에서 공장시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분은 한 명도 보지 못했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머물면 한정된 능력을 가진 디자이너의 길로 인도됩니다.

- 그럼 맨날 시장이랑 타협만 해야 합니까? (스몰 브랜드의 기회)
앞서 시장 분석을 강조하다 보니, "그럼 디자이너는 매번 시장 눈치만 보며 타협해야 하나?"라는 반문이 드실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은 기회의 때'입니다. 그리고 이 포스팅은 안경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뭔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예비 디자이너분들께 도움을 드리고자 해서 올리는 글입니다.
현시점의 시장은 개성 있는 '스몰 브랜드'가 활약하기에 아주 좋은 토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AI를 활용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고, 대중의 취향도 세분화되었습니다.
진저 아이웨어가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선결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소량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만 갖춰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자신만의 확실한 포지셔닝을 통해 당장 '대박'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망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갈 기회'를 계속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리스크가 큰 시도일수록, 소량 생산 시스템이 필수입니다. 안전판이 마련된 상태에서 여러분의 창의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니치(Niche) 마켓의 예는 무궁무진합니다.
연예인급 '센' 디자인: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과감하고 파격적인 스테이트먼트 아이웨어.
빅 사이즈(Big Size)의 세련됨: 머리가 큰 사람도 멋지게 쓸 수 있는, 비율이 완벽하게 계산된 안경. (이거 정말 수요 많습니다. 제가 준비하는 히든 11은 이 타겟입니다.)
힙합 K팝 뮤지션 전용: 시그니처가 확실한 힙합 바이브의 라인업.
돋보기(Reading Glasses)의 고급화: 중장년층의 지갑을 여는 고퀄리티 리딩 글라스.
초경량 스턴트: 기술력의 극한을 보여주는 깃털 같은 안경.
착용감의 끝판왕: 특허 힌지 등을 적용해 안 쓴 것 같은 편안함.
컬러 폭발: 무채색 일색인 시장에서 색감만으로 승부하는 디자인.
독보적인 쉐입: 남들이 안 하는 다각형, 비대칭 등 프런트 디자인의 파격.
나는 안경으로 예술 할 거야~~

이런 아이디어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대량 생산으로 접근하기엔 위험 부담(Risk)이 너무 큽니다. 본인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덜컥 모델 당 300개를 찍어낼 순 없습니다.

그렇기에 철저한 시장 분석과 동시에 소량 생산 시스템이라는 두 가지 무기가 있을 때 비로소 덤벼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실패하더라도 타격이 적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 영감(Inspiration)은 '지식'이라는 토양에서 자랍니다.
디자이너에게 영감은 필수불가결한 연료입니다. 이 영감을 얻는 루트는 정말 다양합니다. 100년 전 빈티지 안경의 역사에서 힌트를 얻기도 하고, 잘나가는 타 브랜드를 분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축이나 자동차 같은 전혀 다른 이종 산업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오기도 하죠. 물론, 타고난 천재성으로 백지상태에서 본인의 순수한 힘만으로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현실적으로 '업계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고 봅니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훌륭한 소스를 봐도 "특이하네" 하고 그냥 지나치게 됩니다. 하지만 안경의 구조, 소재의 특성, 브랜드의 역사적 맥락을 꿰뚫고 있다면, 스쳐 지나가는 사소한 것들도 훌륭한 디자인 재료로 변모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안경 디자인에서도 진리입니다. 끊임없이 업계 지식을 쌓으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영감을 구체적인 '제품'으로 만들어줄 가장 튼튼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 AI 활용
8번에서 언급한 지식이 있는 디자이너에게 AI는 매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에 들어섰습니다. 누군가에게 AI는 혐오이고, 누군가에게는 조수일겁니다. 저에게는 유비가 제갈량을 얻은 느낌입니다.

- FASHION과 FUNCTION
안경은 기능에 더 충실하게, 선글라스는 패션에 더 가깝게 디자인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아실 겁니다. 그래서 선글라스가 히트를 치는 브랜드가 더 매출이 높습니다. 물론 재고 조절이 되었을 경우입니다.

- '제품'만 그릴 것인가, '브랜드'를 그릴 것인가? (디자인의 확장)
직원으로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디자이너, 혹은 오직 제품의 조형미만 깊게 파고드는 전문가(Specialist)로 남는 것도 훌륭한 길입니다. 한 우물을 파는 장인의 길을 가는 것이니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의 '브랜드'를 론칭하고 싶다면, 디자인의 영역을 넓게 잡아야 합니다. 제품 디자인은 기본이고 브랜딩, 마케팅, 웹디자인, 패키지(포장), 광고 디자인 등 연관된 모든 영역에 조금씩은 발을 담가야 합니다.

경험상 대표가 "난 저건 몰라" 하고 소홀히 하는 바로 그 분야에서 반드시 문제가 터집니다.
내가 직접 다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흐름을 알고 작업자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수준의 지식은 갖춰야 합니다. 다행히 지금은 AI 시대입니다. 예전처럼 모든 툴을 마스터하지 않아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AI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신만의 브랜드를 원한다면 제품만 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며: 제조의 도파민
AI가 몇 초 만에 그럴듯한 안경 이미지를 뽑아내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를 실제 착용 가능한 물건으로 구현하고, 시장에 팔리는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땀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제조는 참 힘든 과정입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상상이 공장의 소음 속에서 실제 제품으로 탄생하고, 누군가의 얼굴 위에서 빛을 발할 때 느껴지는 그 짜릿한 도파민은 제법 매력이 있습니다.
이 글이 안경 디자인을 꿈꾸거나 현업에 계신 분들께 작은 이정표가 되길 바랍니다. 제 삽질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실수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추가1. 인종별 차이
한국만 판매한다고 가정을 해도, 남자와 여자, 청소년과 어린아이의 사이즈는 달라집니다. 스포츠 선글라스는 커브값을 달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국을 넘어 전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려면, 경사각 및 코높이, 템플의 길이, 커브값 등의 사이즈에 대해 제대로 알고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아시안핏은 특히 유럽에서 출시된 명품 선글라스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안에게 적합하지 않고 불편해서 이를 개선해서 출시된 모델들입니다. 한국의 에이전시들에게는 병행시장을 통해 들어오는 월드모델과 차별화된 독점적 마진을 창출하는 주요 변수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