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으로 안경 디자이너 되기.
올해 3월 1일부터 시작한 글이 어언 300개가 되어 갑니다. 글 쓰는 재주도 없고 귀찮아하는 제가 전혀 안 하던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20여 년의 업계 경험과 노하우를 정리하고 아카이빙 한 후 공유하고자 함과 제작 중인 브랜드에 대한 약간의 홍보였습니다.
300회 기념으로 이번과 다음의 포스팅으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안경 디자이너가 되는 법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저는 안경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유럽 아이웨어 유통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수입과 브랜드 에이전트를 약 10년 정도 한 경험이 있는 상태에서 뭔가에 홀린 듯 갑자기 중국에 안경 공장을 차릴 생각에 빠집니다. 제 브랜드를 하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강했던 거죠.
한국인 하면 추진력이라고, 알리바바 등을 통해 몇 군데 안경공장을 찾은 후 심천 공장을 방문해서 몇 천 개의 오더를 주고 오더 핑계로 공장을 방문해 필요한 공장 분석을 했습니다. 공간은 얼마나 필요한지, 어떤 기계가 필요한지, 인원은 얼마나 필요한지, 설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산량은 얼마나 나오는지, 공장 마진은 얼마인지, 부품과 하청 등 주변 인프라는 어떤지를 약 3개월간 조사를 하고 바로 50명 규모의 300평 공장을 오픈합니다.

희망차게 제가 생각한 브랜드를 직접 생산했지만 영화 많이 본다고 영화감독되는 거 아닌 것처럼, 디자인과 생산의 격차는 엄청나서 거의 매 공정마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명품시장과 하우스 브랜드의 궤리는 제법 커서 결론적으로 이때 생산한 재고를 10년 넘게 가지고 있다가 거의 폐기 처분했습니다.
공장에 50명의 직원은 매일 놀고 있었지만 잘될 수 있다는 희망에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처음의 꿈과는 다르게 OEM 공장으로 전락해서 오더를 받으러 미친 듯이 돌아다녔습니다.
지인을 통해 FERRE 등 유럽의 준명품 생산 오더를 몇 만장 받았지만, 노하우 부족으로 생산 납기를 못 맞추고 앞으로 남고 뒤로 손해 보는 시간을 보내면서, 절치부심하지만 손실은 계속 커지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때가 젠틀몬스터가 한국에서 막 뜨기 시작했던 시점이고, 중국의 한 대형 체인점이 저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밀어주기 시작합니다. 한국 사람이 중국에서 공장을 하고 있으니 뭔가 할 일이 있을 수 있겠다는 의도였겠지요.

안정적인 거래처가 생기면서 이제 공장은 제법 성장해서 직원은 100명 규모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공장을 운영하는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본 공장을 넘기고 20명 규모의 내 브랜드 전문 공장을 다시 차립니다.
여기서는 순수하게 내가 생각한 브랜드만 전문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작은 성공과 실패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실력은 제법 좋아집니다. 업계에서 히트작도 제법 나오고 간혹 해외 브랜드의 디자인 오퍼도 해 주는 정도가 됩니다.
심천에서 2번째의 공장은 조그만 3층 건물이었는데, 1,2층은 제가 사용하고 3층은 티타늄 공장을 하는 중국 친구에게 임대를 주었습니다. 이 친구가 제 직원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했는데, 중국 말도 서툴고 믿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무시했다가 결국은 문제가 생기고 공장문을 닫습니다. 기계는 10% 가격에 다 처분하고 간간이 한국 하우스 브랜드의 OEM/ODM만 해 주고 한 3년 안경업계를 떠납니다.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우연히 심천을 방문했는데, 3층에 있던 중국 친구가 "당신이 안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낭비"라고 저를 설득합니다. 제가 공장 문을 닫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를 신뢰하게 된 점과, 중국에 새로운 브랜드를 같이 론칭하고 싶다는 의도 등이 모여서 저는 지금 다시 공장을 같이 하면서 브랜드 개발을 하는 상태입니다.

이런 내용을 적은 이유는 이 과정이 디자이너가 되는 과정과 모두 연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 짝퉁? 장물?
명품을 약 7년간 수입 유통하면서 예쁘고 잘 팔리는 모델을 고르는 선구안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경 전문 브랜드를 위한 디자인은 방향이 완전히 달랐죠. 영화 많이 봤다고 영화감독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제 첫 브랜드는 시원하게 말아 먹었습니다.

그 뒤로 약 3년간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아니고, 저는 중국 심천에서 기본기를 갖춰 나가기 시작합니다. 심천은 유럽과 미국의 유명 브랜드 아이웨어를 OEM/ODM 생산하는 세계 3대 안경 생산지 중 한 곳이죠. 그래서 공부하기 좋은 환경입니다.
제 공장 주변에는 유럽 명품을 생산하는 하청공장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물건을 빼돌려서 타오바오에 판매하는 중국 친구들을 몇 명 알게 됩니다. (지금은 다들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면세점을 방불케 하는 사무실에서 이 친구들이 파는 명품이나 유럽 하우스 브랜드는 그 해의 베스트이거나 곧 출시될 다음 해의 디자인들이 많았습니다. 드라이버 들고 정말 많은 제품들을 분해 조립하고 사이즈를 재고 구조를 파악하는 다양한 학습? 을 했습니다. 모르는 건 주변 공장에 물어 보고 연구하고 하면서...
특히 명품들은 장식이 많고, 하우스 브랜드는 색상의 다양함과 힌지 구조의 복잡함이 있어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양쪽을 공부하기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Eye'dc라는 프랑스 브랜드가 망한 후 잔량을 수입하면서였습니다. 한국에 수입하지 않은 수많은 모델들을 모두 인수했는데, 받고 보니 이 브랜드는 할 수 있는 시도는 거의 다 해보고 장렬하게 전사한 상태였습니다.

나사 없는 힌지 개발과 입체적인 구조는 기본이고, 재료를 넘나드는 대담한 시도들, 무게를 위해 착용감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대담함^^, 그리고 착용이 가능하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수많은 아방가르드 모델들과 프랑스 특유의 컬러 배합. '감탄'과 '이러니 망하지'라는 생각의 교차 속에 어느 정도 공부를 한 후 이제는 나도 얼치기 디자이너라고 해도 되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線
저는 처음 공장을 차릴 때 도면도 못 본 사람입니다. 색을 채우지 않은 선만으로 작성된 캐드 도면으로는 상상이 안 가서 애를 먹을 정도로 문외한이었습니다.
예쁜 건 알았기 때문에, 도면을 그렸을 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찾는 건 쉬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아는 데는 약 2년이 걸렸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2년쯤의 시절이 지나고 나니 어느 날 線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수라고 하기에는 낯부끄럽고 내 나름의 선이 보이는 정도입니다만, 이때부터 다른 브랜드는 참고 정도만 하는 과정으로 넘어갑니다.
이 깨달음은 묘한 장점을 줍니다. 이제 안경뿐 아니라 자동차, 컵, 의자, 집 등 모든 사물의 선이 보이고 그 선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무림의 고수가 되었다기보다는, 저만의 확실한 디자인 기준이 생겼다는 의미입니다. 삶이 좀 더 풍요로워졌다고 할 수 있겠죠. 당연히 안경을 제외하고는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많은 사물과 디자인 전체로 관심이 넓어졌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게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기간 동안 중국 말로 꽌시도 생기고 중국 친구들과 제법 친해집니다. 동네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 구글링
구글링은 짝퉁(명품 공장 도난품?) 과는 다른 의미로 나름의 공부였습니다. 공장을 운영하고 공부하면서 틈틈이 구글링을 거의 3년은 한 것 같습니다. 10년 단위로 분리해서, 1800년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을 했습니다.
수많은 브랜드와 모델 기원 등에 대해 알게 되었고, 검색 중 새로운 브랜드가 나오면 다시 그 브랜드를 기준으로 검색을 하고 정리를 해나갔습니다. 잡지, 박물관, 홈페이지, ETSY, EBAY, 데드스톡, 등 안 뒤져본 내용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로 검색하고 공부하고 정리했습니다. (이상하게 일본만 그렇게 자세히 안 뒤졌는데 이유가 뭘까요?)

그리고 거의 10년에 걸쳐서 지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약 2~3년에 걸쳐 심천 안경 공단의 인프라도 파악을 하게 됩니다. '같은 부품이라도 잘하는 공장과 일반 공장의 품질 차이' 같은, 시간과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디테일들을 파악했습니다. 처음 공장을 차릴 때 설비만 알면 된다고 생각했던 정신 나간 오만함이 겸손해지기 시작한 거죠.
안경 디자인을 포함한 많은 디자인의 영역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제품이 기능을 제대로 하고, 시장에서 반응을 해 주는 한 정답과 오답은 없습니다. 가능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흡수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시켜 조직과 시장에서 인정받으면 디자이너입니다.
300번째 포스팅에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제가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내용으로 올리겠습니다.
